
샛골나이
무명의 역사는 고려 공민왕때 문익점이 원나라로부터 목화를 가져와 심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14세기 후반에 들어온 목화는 짧은 기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 조선조 태종때는 거의 모든 백성들이 무명옷을 입게 된다. 이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우리를 백의민족으로 칭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나주샛골나이 설명
무명베에 아무런 색을 들이지 않은 옷은 사실 흰색이라기보다는 소색(消色)이라 한다. 옷감에 물을 들이면 그 만큼 비용이 추가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이 소색의 옷을 입었던 것이다. 소색보다 하얀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번 빨아서 햇빛에 탈색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조선시대 모든 백성이 입었던 이 무명베가 일제로부터 근대적인 직조기술을 들여오면서 광목과 옥양목으로 변하고 전통 무명베의 맥을 잇고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 나주 다시면 동당리의 ‘샛골나이’와 경북 성주군 용암면 본리의 ‘두리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나주 샛골나이’란 원래 다시면 초동 샛골에서 생산되는 무명베와 그 무명베를 생산하는 사람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다시면 전체가 샛골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명베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다시장(샛골장)에 가지고 나와 팔았기 때문에 샛골나이는 다시면에서 생산되는 무명베를 말하는 것이라 해도 좋다. 대체로 근대적인 직조기술이 들어오기 전에는 전국 어디서나 목화에서 실을 타고 그 실로 무명을 짜는 길쌈이 행해졌다. 그 가운데 나주 다시면에서 생산되는 무명베는 전국적으로 그 결이 곱기로 유명했으며 궁중에 진상되었으며 만주에까지 팔려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보통 곡우를 전후하여 목화를 심고 추석때면 다래가 열리고 한로를 전후하여 그 다래를 따서 양지에 말린 다음 목화를 선별한다. 목화를 선별하여 씨아기에서 씨를 앗아낸 다음 가락에 짓눌린 솜을 타서 보송보송하게 솜을 탄다. 이때는 대나무로 만든 솜활을 이용하여 헝겊을 왼손에 쥐고 활줄을 퉁기면 밑에 깔려 있던 솜이 활줄에 달라붙으며 보송보송 피어난다.
그 솜으로 고치를 대나무 말대에 말아 말대를 뽑아내면 고치 모양의 솜이 된다. 솜고치의 한 끝에서 실올을 뽑아내 가락옷에 감아놓고 물레를 돌리는데, 가락 하나에 감긴 실뭉치가 한 꾸리가 되며 무명베 한 필에는 수십 꾸리의 실뭉치가 들어간다.
실을 뽑을 때는 열 가락씩 실꾸리를 꼽을 수 있는 날틀에 실뭉치를 걸어 열 올의 실을 만들어 빼낸 뒤 그것을 한 필의 길이와 새에 맞춰 베날기를 한다. ‘새’란 옷감의 촘촘함과 짜임새를 나타내는 날실의 올수를 말하는 것으로. 날틀에서 실을 뽑아 걸틀(실을 거는 틀)을 한번 돌아 날틀까지 오면 20올, 두 번 돌면 40올이 되며, 이렇게 네 번을 왔다갔다 해서 80올이 되면 한 새가 되는 것이다. 무명의 짜임새는 이 새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새가 많을수록 올이 가늘고 베가 고와 상등품이 된다. 보름새라 하면 15×80하여 1,200번의 작업을 반복하여 짠 베를 말하는 것이다. 베날기가 끝나면 바디의 구멍에 날실을 끼워 풀을 먹이고 도투마리에 감는 베매기 과정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오랜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야 하는 베틀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오로지 여성들만의 몫으로 주어진 일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지은 농사로는 소작료를 주고 나면 먹을 양식도 부족한 형편이었고, 여성들이 길쌈을 하여 무명베를 짜면, 장에 내다 팔아서 가용에 보태 쓰고, 또 남겨둔 베는 명절 때 입는 입성으로 식구들에게 입혔다. 전통시대 여성들의 노동량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가난한 동네에 시집오면 새벽까지 길쌈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인 다음 첫닭이 울면 일어나 보리쌀을 앉혀서 아침을 지어 식구들에게 먹이고, 다시 들로 나가서 들일을 하거나 일꾼들 식사준비를 했다. 그래서 길쌈을 하면서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헐라도 나를 나서 놈의 가문 보냈는가’ 하면서 고된 시집살이에 대한 내용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던 것이다.
노진남은 다시면 청림마을에 시집와서 시어머니인 고 김만애 여사로부터 길쌈을 배웠다. 김만애 여사가 길쌈을 할 당시에는 보름새 혹은 열여덟 새 베까지 생산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그 며느리인 노진남 여사가 그 기능을 이어받아 활동중이다. 그녀와 같은 숙달된 직녀라면 사흘에 한 필을 짜낸다고 한다. 현재 노진남 여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