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역사기록 자세히 보기
1914년 일제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남평군 일원과 함평군에 넘겨주었던 적량, 여황, 장본의 3개면을 다시 편입되어 총 42개면이 되었다가 각 면 폐합에 따라 19개면, 222개 동리로 개편되었다. 1917년에는 양지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고, 1929년 나주면과 나신면을 합하여 나주면으로 칭하였으며 1931년 나주면은 나주읍으로, 193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였다. 영산포는 현재 전라남도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선 내영산 일대에 주로 사람들이 살았으나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강 건너 현재의 이창동과 영산동 등이 개발되어 오늘에 이른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때 나주는 별다른 소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나주읍내에서 수백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가 자진해산하는 정도로 규모도 작고 소극적이었다. 이는 구한말의 의병투쟁때 너무나 큰 피해을 입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이후 나주지방의 민족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진다.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신간회, 학생운동 등이 조직되고 나름의 운동을 펼쳐나간다. 1920년 나주청년수양회로부터 시작하여 1922년 나주청년회관을 준공하고 나주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나주의 노동 농민운동은 주로 경성에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이항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는데, 궁삼면 토지회수토쟁 지원, 소작쟁의 지원, 노동자들의 파업 지원 등의 활동을 펼쳤다. 게다가 1927년 창립된 신간회는 나주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을 모아 나주협동상회운동, 남평유림각 사건, 학생독립만세운동 등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자세히 보기
기미독립만세운동 이후부터 축적된 조직의 역량은 1929년 학생독립운동때 폭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른 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역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당시 통학열차는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는 화약고였다.
아침 7시경 나주역을 출발해 광주로 향하고 오후 4시 40분 경 광주역을 출발해 목포로 향하던 통학열차에는 차량 네칸이 연결돼 있었는데 첫 칸은 여학생, 둘째칸은 일본인 학생, 셋째칸은 조선인 학생, 넷째칸은 일반인이 탑승했다.
나주통학생들은 당시 광주고보를 비롯한 각 중등학교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던 동맹휴학의 불길 속에서 항일의지를 키워나가고 있었는데 30여명의 통학생 중 10명은 비밀항일조직인 독서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독서회에서 활동하던 통학생들은 일반 통학생들에게 사회과학서적을 권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높이는 한편 나주역 사건에서처럼 일본인 학생들의 멸시나 도전을 응징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학생들이 함께 이용하던 통학열차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화약고나 다름 없었다.
1929년 10월 30일오후 5시 30분경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자 기차에서 내려 출구로 향하던 박준채(광주고보 2학년)는 광주 중학생 후꾸다(福田), 스에요시(末吉), 다나카(田中) 등이 자신의 사촌누나 박기옥과 이금자(암성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것을 발견했다.
화가 난 박준채가 후꾸다 앞을 가로막고 "후꾸다, 명색이 중학생인 녀석이 야비하게 여학생을 희롱해?"하고 따진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박준채가 당돌하게 나오자 후꾸다도 물러서지 않고 "뭐라고? 조센진 주제에"라고 응수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준채의 주먹이 후꾸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조센진 주제에"란 말은 한국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싸움은 집단적으로 번져 나갔다. "그자식, 죽여!" "죽여!" 격분한 한국인 학생과 인본인 학생들은 한데 뒤엉켰다. 이 싸움으로 인한 부상자는 학생수가 많은 일본인 쪽이 오히려 더 많았다.
싸움이 한창일 때 나주역을 순찰중이던 모리다라는 일본인 경찰이 달려왔다. 모리다는 불문곡직하고 박준채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욕설을 퍼부으며 일본인 학생편을 들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나빠, 도대체 건방지단 말이야" 박준채는 일방적인 모리다 순사에게 눈물을 흘리며 대들었다. "무엇이 건방지단 말이오? 시비는 가리지 않고 편파적으로 사람을 치는 것이 경찰이오?" 이를 지켜보던 통학생들도 항의 했다. 모리다는 항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박준채의 빰을 한차례 더 때렸다. 싸움은 끝났지만 박준채와 통학생들은 그것으로 끝날 수 없었다. 모두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으며 박준채도 분을 참지 못하고 "어디두고 보자"고 별렀다.
이날 일본인 학생들과 싸웠던 통학생들은 광주고보 5학년 김보섭(독서회원)·최희선, 4학년 오쾌일(독서회 회원)·서형윤·정세면, 3학년 승천일·최희연·손동출·이이근, 2학년 박준채·김만섭·서형수·이경련·이순태, 1학년 김정수 등이었다.
1929년 10월 31일 박준채는 방과 후 열차안에서 다시 후꾸다를 찾아가 "너 어제 우리 누나한테 희롱한 것 사과해!"라고 요구했다. 후꾸다는 "건방진 자식, 잔소리 말라"라며 별안간 박준채의 뺨을 때렸다. 기차안에서 둘은 또 한데 엉켜 싸웠다. 싸움이 한창일 때 차장이 달려왔고 박준채와 후꾸다는 일반인 칸의 차장실로 끌려가 통학권을 압수당했고 박준채만 뺨을 한대 맞아야 했다.
이때 일반인 칸에 타고 있던 광주일보의 일본인 기자 한 명이 후꾸다의 일방적인 얘기만 듣고 무조건 박준채를 비난했다. 차장실에서 나오자 일본인 승객들까지도 "조선인 주제에 건방지다", "네가 잘못했다"며 야단쳤다. 박준채는 나라 잃은 설움이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수 밖에 없었다.
11월 1일 나주역에서 통학권을 찾아 학교에 간 박준채는 수업이 끝난 후 교감에게 불려가 "기차통학생들의 충돌은 민족감정의 충돌"이라며 "중대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으니 신중히 사태를 수습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사실 이 날 오전부터 한일 양측 학생들의 감정대립으로 거리가 살벌해 서로 피해를 입을까봐 수십 명씩 패를 지어 다니고 있었다.
4시 45분경 광주역에서 통학열차가 출발하려고 할 무렵 손에 무기를 든 광주중학생(일본인중학생)들과 한국인학생들이 대치한다. 이 사실이 학교에 알려져 경찰과 교사들의 제지로 각자 학교로 물러났던 광주고보생들은 강당에 모여 사건경위를 듣고 대책을 논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고 4학년 오쾌일의 제의로 일단 모임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3일 간의 충돌은 끝나고 11월 2일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11월 3일을 맞는 폭풍전야였을 뿐이었다.
나주통학생들은 11월 3일의 1차 시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특히, 김보섭·김종섭·이계춘·오쾌일·이영범(광주고보) 등 독서회 회원들이 앞장섰다고 독서회사건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김보섭은 광주지역 중등학교 독서회의 지도부인 독서회 중앙부에 광주고보 대표로 참여하여 조사 선전부를 맡아 주도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11월 12일 2차 시위가 독서회를 중심으로 준비되는 과정에서도 나주통학생들이 앞장서는데 1차시위 이후 검거를 피할 수 있었던 광주고보의 오쾌일과 이영범은 독서회의 지도자 장재성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다. 특히, 오쾌일은 4종의 유인물을 직접 제작하고 배포했으며 2차 시위의 책임을 자신이 지기위해 유인물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었는데 시위 직후 동경으로 피신했다가 검거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도 1929년 11월 27일 나주장날을 기하여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 남고문에서 나주장(지금의 매일시장)까지 만세행진을 하여 가장 큰 규모의 시위운동을 조직하여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1930년 1월 개학하자 마자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백지동맹(시험거부)사건을 일으켰는데 광주고보의 주도자 중 나주통학생들은 손동출과 정세면이었고 광주여고보의 주도자 중 나주학생들은 나주역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이광춘과 그녀의 언니 이금자였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 자세히 보기
학생독립운동과 함께 나주지역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삼면토지회수투쟁을 들 수 있다. 탐관오리의 부패가 극심하던 조선조 말 나주의 지죽면, 욱곡면, 다시면 등지의 드넓은 땅을 착복해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 거듭되는 흉년으로 조세를 내지 못한 농민들에게 경저리(지방의 일을 서울에서 대신 처리하던 지방관) 전성창 등이 대납하였다고 하면서 백지날인을 시켜 훗날 이 땅을 모두 몇몇 관리 앞으로 옮기고 이를 다시 경선궁의 궁장토로 되팔아버림으로써 궁삼면(宮三面)이란 명칭을 갖게 된 사건이었다. 이에 불복한 농민들이 소송을 걸어 최고재판소로부터 농민들이 승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선궁은 다시 이 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팔아 땅을 잃은 농민들은 해방이 되고 동척을 그대로 인수한 미군정의 신한공사에 이르기까지 땅을 되찾기 위한 끝없는 투쟁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나주지역에는 1950년부터 시작된 남한의 토지개혁때 땅을 되찾고도 아직 자기 앞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땅이 상당수 있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일선 동사무소에서 땅의 원주인을 되찾아주는 운동까지 펼쳤을 정도다. 궁삼면 토지회수투쟁은 소설가 문순태에 의해 『타오르는 강』이라는 대하소설로 형상화되어 우리에게 다시 그 꺼지지 않는 불길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