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면 중기구석기 유적 설명
최근 2001년에는 금천면 신가리 당가마을 유적에서는 집중적으로 구석기 유물이 발굴되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유적 내의 지층을 일별해보면 지층별로 시기를 알 수 있는데, 혹독하게 추운 빙하기와 비교적 따뜻한 간빙기의 흔적이 나타난다. 지층이 얼었다가 풀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층을 뚫고 내려오는 얼음쐐기의 규모가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최대의 규모로 나타나고 있다.
당가유적에서는 최종빙기와 최성기에 걸치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는데, 7만년 전후 혹은 그 연대를 넘는 중기구석기시대의 문화층으로 목포대학교 박물관팀은 추정하였다. 게다가 두 개의 문화층이 더 확인되어 각 시기별 석기문화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발굴이었다. 게다가 제2문화층에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30-45cm가량의 폭을 가진 얼음쐐기구조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석영제 자갈돌을 석재로 활용한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이 확인되었는데, 양면을 박리하여 둥근 날을 조성한 양면찍개, 여러 면 석기류 및 격지, 석구라고 할 만큼 둥근 형태를 가진 여러 면 석기, 외면찍개류, 몸돌 등을 발굴하였다.
특히 지층의 형성과정을 보면 오랜 기간에 걸친 3개의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자갈돌석기 전통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면 석기와 찍개 그리고 대형 긁개 등 우리나라 중기 구석기시대의 유적에서 보이는 석기문화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구석기 유물과 유적은 강가나 해안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로써 이들의 생활형태를 추정해보면 특정지역을 점거하여 주거하였던 것이 아니고 영산강 지류에 형성되어 있는 구릉의 전 지역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생계를 유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에 많은 유적이 분포하는 것은 당시 구석기인들이 수렵과 채집 그리고 부분적으로 강이나 바다의 자원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 지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다시면 가흥리에서 발견된 기원전 1천년경의 벼의 꽃가루는 당시의 유적이 존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벼의 원산지가 동인도와 베트남 등지의 무더운 기후 지역이기 때문에 나주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농경사회가 형성되었으며 이에 따른 신석기 농경문화가 영산강의 퇴적층 속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원전 1천년경에 시작되는 청동기시대에 나주에서는 고인돌과 유물산포지의 유적과 토기, 석기 및 청동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이 삶의 흔적을 나타내는 도구들인 반면 청동기시대 유물과 유적은 죽음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고인돌은 우리 선조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최초의 철학적 인식을 담고 있는 유적이다. 나주지역의 고인돌은 지석(支石)이 없는 개석식(蓋石式)과 남방식이 대부분이나, 봉황면 만봉리 저수지와 다시면 회진리 회진토성, 다시면 송촌리 본촌 등의 고인돌이 판석으로 만든 석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북방식으로 밝혀졌다. 남방식은 지석묘 덮개돌 밑에 4-8매의 지석을 고이고 지하에 석실을 만든 형태이며, 개석식은 지석 없이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바로 덮개돌을 덮는 형식이다.
기존에 알려진 고인돌은 133개군 1,41기였으나 1998년의 지표조사시 117개군 1,000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14개군 60기가 새롭게 확인된 유적이기 때문에 이미 35개군 101기의 고인돌이 도로건설이나 경지정리, 묘지조성, 야산개간 등으로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주지역의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들로는 무문토기편이나 화살촉 등이 많다.
그리고 유물산포지는 대체로 주거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장 대표적인 곳이 노안면 영평리유적이다. 이 유적에서는 석검, 삼각형석도, 방추차, 편평단인석부로 보아 주거지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곳이다.
2001년 발굴된 금천면 촌곡리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수혈주거지 총 9기가 나주지역에서 최초로 발굴되었다. 주거지의 형태는 방형과 타원형이며, 그 내부에는 충청도지방의 송국리 계통의 타원형의 구덩이와 주공이 있고, 층위상의 계단식과 방형계가 원형계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촌곡리 제4호 수혈유구에서 석기제작에 필요한 석재와 미완성의 석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주거지와 생산장소라는 공간분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주지역의 청동기문화는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문화의 성격은 대체로 충청도의 송국리문화와 유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생업수단은 수렵과 채집 이외에도 농경이 포함될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한 자료는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지배계층이 출현하는 족장사회에 진입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