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기(양민학살사건) 역사기록 자세히 보기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학살된 양민학살이 6.25전쟁기에 이곳 나주에서도 있었다.
자력보다는 타력에 의한 성격이 강했던 한국의 해방, 해방 당시 북쪽은 주로 소련의 영향 아래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좌익세력이 장악하였고, 남쪽은 이승만,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친일세력을 규합한 우익세력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중도좌익세력,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등이 서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군이 진주하면서 일제의 행정력과 경찰력을 그대로 활용하고 그 권력의 정점만 일제에서 미군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일제에 붙어서 조선민중을 핍박하던 자들이 일제의 패망으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 관망하다가 미군정에 의해 다시 권력에 빌붙을 기회가 생기고, 여기에 정권을 잡기 위해 국내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이승만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한민당이라는 정당으로 그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세지 동창교 양민학살사건 자세히보기
1951년 1월 20일 함평군 월야면에 주둔하면서 월야, 해보, 나산 지역의 집단양민학살을 주도했던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가 장성 고성산 갈재(蘆嶺)로 작전을 나갔다가 실패하고 기차로 송정리까지 와서 밤새 걸어서 영산포에 당도했다. 당시 나주에 피난해 있던 구국총연맹 세지지부에 경찰관이 와서 세지면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들과 함께 세지면을 수복하러 간다는 뜻을 알려 이들을 대동하고 5중대는 세지로 향하였다.
5중대는 두 갈래 길로 세지면을 포위하고 들어와서 동창마을과 이웃 섬말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동창교 아래로 불러모았다. 세지면 유지 및 기관단체장을 신북여관(현재의 세지 터미널 자리)에 있으면서 소와 돼지를 잡게 하고는 아기를 업고 나온 국민학교 교사 박영만 씨의 부인 노점숙 씨를 사살한 것을 시작으로 12명씩 줄을 세워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사격을 가함으로써 96명을 사살하였다. 가까이서 조준하여 총을 쏘았음에도 불구하고 즉사하지 않고 신음소리가 나자 중대장은 다시 확인사살토록 지시했으며, 인근에서 농사를 준비하던 농부들 40여명을 산야에 배치시킨 군인들에게 명령하여 사살하였다.
다도면 암정리 소개작전 자세히 보기
한국전쟁 당시 다도면 암정리 갱갱굴과 절꼬랑에 살면서 피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군경이나 빨치산 양쪽으로부터 적으로 취급당하고 살았다. 군경은 나주나 영산포로 피난가지 않았다 하고, 빨치산은 군경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면서 밤낮을 번갈아가면서 괴롭혔던 것이다.
1월 21일 아침이 밝아오자 눈덮힌 산으로부터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산을 쳐다보니 산에서 군경이 봉황쪽에서 넘어오고 있었고 마을 아래쪽으로도 들어와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총소리를 들은 마을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귀로는 핑핑 스치는 총알소리를 듣고 옆에서는 다른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기를 쓰고 뛰어서 도망하였다. 1차 작전이 끝나자 군경은 빨치산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다가 집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쏘아죽였다.
이날 28명이 사살되었다.
봉황면 철천리 양민학살사건 자세히 보기
1951년 2월 26일 경찰이 들어와서 수각, 선동, 등내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철천리 철야마을 만호정으로 왔다. 이들을 끌고 온 것은 봉황지서(지서장 이기호)와 특공대(대장 공 명)로 이들 가운데 몇몇을 가려내고 나머지 30여명을 데리고 다도면으로 넘어가는 동박굴재 고개에서 집단학살을 하였다.
문평면 국동리 유전마을 학살사건 자세히 보기
1951년 5월 보리베기 할 무렵 금성산을 넘어온 경찰은 동막골에서부터 끌고온 양민 42명을 한꺼번에 학살하였다.
이 마을 역시 낮에는 경찰에 밤에는 빨치산에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는데, 총에 맞은 경찰을 지서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게 총을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당시 이 마을과 노안면 금안리는 산을 넘어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도 모두 일하러 가거나 일을 마치고 오는 길에 희생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