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국권상실기 자세히 보기
이 시기에 1894년 나라를 바로잡고자 하는 동학의 봉기가 있었고, 1895년 나주관찰부의 설치가 있었고, 단발령과 이를 무자비하게 집행하였던 관리들에 항거한 나주인들의 의거가 있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 선포가 있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방이 있었다. 나주는 다른 어느 고장보다 보수성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그러나 그 보수성은 당시 나주인들이 가진 가치관중 가장 소중한 것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당대의 상황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나주는 일제의 압력이 거세지던 시기에 항일의 의기로 일어선 항일의병 활동이 특히 왕성했던 지역이다.
나주와 동학농민운동 자세히 보기
고려시대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와 맞서는 과정도 역시 마찬가지다.
삼별초는 강화의 고려정부가 30년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백성의 고통이 심각해지면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몽고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진도로 옮겨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면서 항쟁했던 고려의 자주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별초의 부대가 나주에 진격해오자 나주인들은 이를 적으로 인정하고 맞아 싸우게 된다. 그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우선 나주는 제2대 혜종의 고향이다. 게다가 대대로 중앙권력과 밀착된 상태로 이어온 까닭에 아무리 몽고에 대한 항쟁에 나섰다 하더라도 중앙권력과 반하는 것이라면 이는 나주인들에게는 옳지 않은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더구나 삼별초라는 군사집단의 성격을 파악해보면 나주인들에게 삼별초는 결코 옳지 않았다. 우선 삼별초는 최충헌이라는 집권자의 사병적 성격이 강한 데다가, 실제로 대몽 항쟁기간에는 전 국민이 몽고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을 때 강화도에서 집권 권력자들과 함께 피해 있었던 친위세력이었다. 거의 모든 군사력이 바닥났을 때도 오직 삼별초만은 남아 있어서 몽고의 고려지배에 장애물이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을 해체시키고자 삼별초의 조직과 인명록을 요구하므로 이에 반기를 들고 진도로 내려갔던 것이다. 이런 삼별초에 대하여 나주인들은 호장 정지려를 중심으로 뭉쳐 금성산성에서 맞아 싸워 물리쳤다. 후일 금성산이 정녕공에 작위를 얻게 된 것도 삼별초의 진압에 금성산신의 힘이 컸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동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사대부들은 금안동이나 회진 등에서 살고 있었고 나주읍성내에는 관리와 아전 그리고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사대부와 관리들이 보기에 동학은 혹세무민하는 사교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전라도 53개 고을이 모두 동학에 무릎을 꿇었으나 나주만은 굳게 성을 지켜 동학농민군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기에도 동학에 성을 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배후에서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 시기에 나주에는 동학을 진압하게 될 초토영이 설치되었고, 나주목사 민종렬을 위시한 유림과 관리들은 끝까지 성을 지켜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전라우영에는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하여 최경선 등 동학 지도자들이 모두 잡혀와 처형되었고, 전봉준만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단발령과 나주민란 자세히 보기
동학이 평정된 후 나주에는 나주관찰부가 설치되고 지금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가 도임하였다. 당시 정국을 장악한 일제에 의해 단발령이 실시되고 나주에서도 관찰사를 대리한 참서관 안종수 등이 길을 가던 선비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머리를 깎는 사태가 발생하여 유림들이 이에 반기를 들고 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장성에서 송사 기우만이 의병을 이끌고 나주로 달려오는 등 그 세가 자못 왕성하였는데, 다만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외세를 물리치고 국정을 쇄신하자고 주장하면서 치안을 유지하고 있던 중 관군이 들어오자 순순히 성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관군은 주모자인 김창균 부자를 체포하였고, 해남 군수로 부임했던 정석진을 압송해와서 이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말았다.
1896년 6월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여 전라남도가 만들어지면서 관찰부는 광주로 옮기게 되었고 다만 나주군과 광주군이 1등군으로 편제되었다. 나주는 행정구역 개편에서 38개면, 32개 섬 가운데 32개 섬은 새로 만들어진 지도군에 넘기고, 원정·금마·비음·종남의 4개면은 영암군에, 적량·장본·여황면은 함평군에, 오산면은 광주군에, 대화면은 장성군에, 삼향면은 무안군에 넘겨 28개 면이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나주는 의병의 근거지가 되었다.
구한말 의병장 자세히 보기
가장 먼저 의병부대를 이끈 사람을 박민수로 금성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의병장 박민수는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서 출생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 문준호·정병균·박양수·박사과·이군보·김원숙·박재홍·임종기·최장홍·김만봉·주영선·이치열·김군보·박양상·김유성·이유석·정서홍·임수돌·임종익·임종철·배좌양·박일서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서 다시면 신걸산을 본거지로 해서 왜군과 싸웠다.
김태원은 나주군 문평면 북동리(갈마지)에서 김노학의 장자로 출생하여 소년시절에 유학을 배웠고 이웃고을까지 장사로서 이름이 났었다. 25세때 전봉준의 척왜척양 보국안민을 외치는 주장에 공감해서 백산기포(白山起包)에 참가하였고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난 후에 일시 귀가하였다가 당시 관속들의 감시를 피하여 한성으로 가다가 수원에서 애국지사 김가락(金河落)을 만나 1896년 봄에 명성왕후를 살해한 일본세력을 몰아내고 단발령을 반대하는 의병 항전에 참여해서 경기의병 창의대장 민승천의 선봉장이 되어 이천·광주·여주·수원·안산·남양 등의 전투에서 가는 곳마다 용명을 떨치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때 실의를 안고 나주로 돌아왔다.
1905년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오적신에의해서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애국정신에서 구국투쟁에 동참할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7월에 그 아우 김율(金律)과 더불어 나주·광주·함평·영광·장성·무안군에 사는 김돈·조경환·강길환·이덕삼·유병기·양상기·오영모·김찬문·김해 등 수백명의 항일의병을 거느리고 나주·함평·무안·장성·영광등지에서 일본군대와 경찰대 및 그들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등 친일세력을 기습공격하는 전투를 벌여 오다가 1907년 9월 장성군 동화면 서양리 석수암에서 호남의병회맹소 기삼연(奇參衍) 대장과 합류하여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문수사로 본진을 옮겨 그곳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장성 법성포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에게 많은 손실을 주었다. 그후 기삼연과 헤어져 독립부대를 이끌고 전라남도의 서남 곳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오다 그해 12월 나주 사호(현 광주시 사호동) 전투에서 일본군 이백여명을 사살한 후 설날 전날밤에 조용한 곳에서 새해를 맞기 위해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 들어갔다. 1908년 1월 1일 설날 새벽에 그 마을에 사는 친일밀정의 고발로 청일·러일정쟁에서 용맹이 있던 광주지구수비대장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이 이끄는 일본군들이 이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오자 죽봉은 삼백여명의 적은 병력뿐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긴 돌담장이 많은 지형을 이용해서 잠복해 있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일본부대를 전멸시켰다. 그 다음날 기삼연이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광주로 끌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우 율에게 일부 병력을 나누어 주어 화순방면으로 보내고 본인은 기삼연을 광주로 가는 중도에서 탙출시키기 위해 광주 경양방죽까지 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후 장성·영광·나주·고창·함평 등지에서 일본군과 일인들이 있는 병참소등을 계속해서 유격전술로 기습해 오니 일본군은 길전(吉田)부대가 참패된데 복수심을 품고 병력을 더욱 보충해서 죽봉부대를 추격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죽봉은 의병을 일으킨 후 40여회의 크고 작은 승전을 하여 왔지만 이해 늦은 봄이 되면서 전남도내 의병항쟁이 거의 사라겨 가고 죽봉부대만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기 때문에 신무기로 무장된 일본군들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 장성 대곡싸움에서 무기와 병력의 열세 때문에 패전하고 광주 어등산에서 일본군 대부대에 포위되어 여러날 동안 악전고투하다가 지병인 요통이 재발되어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죽봉은 부하들을 제각기 살길 찾아 도망치게 한 다음 박산 (광주시 박호동)마을 뒤 큰 바위위에 올라가 적탄에 맞아 3월 25일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고 광주시 농성동에 전남유도회에서 도민의 성금을 모아 동상을 건립하고 함평읍 기산공원과 나주시 남산공원에 충혼비가 있으며 진안군에 영광사(永光祠)가 있고 함평군 나산면 죽림리에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조정인은 서울 만리동에서 태어나 임오군란에 참가했다가 아우 정룡과 함께 고향인 나주 산정동 명당거리로 피신해서 내려왔다. 1907년 12월 김태원의 의병에 들어가 나주·광주·함평·장성 등지에서 항일전을 거듭하다가 1908년 6월 15일 현 광주시 광산구 신촌에서 나주헌병대에 잡혀 1909년 1월 25일 대구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최택현은 나주 다시면 동곡리 동촌에서 태어났다. 종형 광형, 종제 병현, 아들 윤룡과 더불어 의병 20여인을 모집하여 항일전을 벌여 왔다. 1907년 9월 17일 함평군 학교면 석정리에서 영산포헌병분대원과 싸우다가 병기의 열세때무에 패전하여 종형, 종제,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권택은 나주시 봉황면 욱곡리 구례동에서 출생하여 벼슬한 일은 없고 경서를 많이 읽었고, 대담하며 소탈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07년 6월에 기삼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기삼연이 죽은 후, 1908년 5월에 심남일 막하에 들어가 항일전을 계속해 오다가 1909년 9월 25일에 장흥읍 예양리에서 잡혀 죽었다.
박사화는 나주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김태원의 의병에 참가하였다가 1908년 4월 25일 어등산에서 패전하고 그해 5월 심남일과 합세하여 그 중군장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1월 독립부대를 이끌고 나주를 중심으로 항전하였는데 그해 1월 21일 150여인을 거느리고 나주군 와옥면 월천리 구천동에서 영산포헌병대와 싸우고, 1월 25일 왕곡면 신포리에서 영산포 분견대와 싸우고, 6월 1일 영암군 신북면 이천리에서 50여인이 영산포헌병대와 격전하였다. 6월 11일 반남면에서 의병 70여인과 나주분견대를 공격하고 7월 14일 병력과 무기의 열세 때문에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게됨을 판단하여 영산포헌병분대장과 나주군 상곡면에서 회담하고 부하 100여인이 자수하면 생명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7월 18일~19일에 박사화·김선중 외 15인이 영산포헌병분대에 투항하였다가 박사화는 밤중에 다시 도망쳤고 그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 외 전북 임실군 출신 의병장 전해산은 1907년부터 나주지역에서는 가장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인 분으로 1910년 8월 대구감옥에서 처형되었다.